조선봉건왕조시기 금속화페의 류통

조선봉건왕조시기 금속화페의 류통

조선봉건왕조시기 전국적범위에서 통일적인 금속화페가 류통되게 된것은 상품화페관계발전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의 하나로서 상품생산과 류통, 상업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금속화페류통의 력사는 매우 오래다.

이미 우리 나라 고대국가들에서 금속화페가 류통되였으며 그후 세나라시기에도 금속화페가 류통되고있었다.

그러나 당시 금속화페의 류통은 부분적인것에 지나지 않았고 쌀이나 천과 같이 현물화페가 기본화페형태로 되여있었다.

그러던것이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이르러 금속화페가 점차 현물화페를 구축하고 전국적범위에서 류통되게 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 전국적으로 류통된 금속화페는 상평통보인데 동으로 만든 금속주화였다.

《상평통보》라는 이름은 조선봉건정부의 중앙관청의 하나인 상평청에서 주조한데로부터 나왔다. 흔히 엽전이라고 하였다.

상평통보 1잎을 1문 또는 1푼이라고 하였으며 10잎은 1돈(전), 100잎을 1량이라고 하였다.

보통 100잎(1량)을 한줄에 꿰였는데 이것을 1민이라고 하였으며 10량의 엽전(1 000잎)을 1관이라고 하였다.

금속화페류통이 확대발전하는데 따라 착취계급의 치부욕은 더욱 증대되였다.

이에 따라 봉건국가는 더욱더 많은 량의 세납을 금속화페로 수탈하였으며 지주들도 농민들을 화페지대를 통하여 착취하였다.

이러한 조건에서 농민, 수공업자들은 자기들의 생활에 필요한 일용품과 농산물의 구입은 제외하고라도 봉건국가의 조세나 지주들의 지대를 물기 위하여서도 장마당을 대상으로 하는 상품생산을 벌리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이것은 경제의 여러 부문들에서 상품생산의 장성을 가져오고 류통되는 상품량을 증대시켰다.

통일적인 금속화페의 류통은 또한 현물화페의 제한성을 극복할수 있게 함으로써 상품류통을 다그치고 그 발전을 자극하였다.

쌀이나 천과 같은 현물화페는 그가 가지고있는 화페로서의 제한성으로 하여 사람들의 교환활동에 적지 않은 불편을 주었다.

간편한 금속화페가 전국적으로 류통되게 됨으로써 현물화페를 통한 상품류통의 제한성은 현저히 극복되게 되였다.

통일적인 금속화페의 류통은 자본주의적경제관계의 발생발전을 촉진시켰다.

봉건통치배들은 엽전의 대량적인 주조과정을 통하여 근로인민들을 추가적으로 수탈하였다.

그들은 엽전주조때 금속의 품위가 낮고 무게를 제대로 보장하지 못한 나쁜 돈을 만들어내여 강제로 류통시킴으로써 막대한 주조리득을 얻었다.